1. 서론: 모두를 위한 의약품은 존재하는가?
의약품은 인류의 생명을 구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가장 강력한 도구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도구’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소득, 지역, 정치적 환경, 물류 인프라, 제조 기술 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 어떤 사람은 최신 치료제를 빠르게 접할 수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기본적인 백신조차 접종받지 못한 채 질병의 위험에 노출되기도 합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은 전 세계적으로 '백신 격차(Vaccine Gap)’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의약품 접근성의 불균형을 극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의약품 접근성의 개념, 글로벌 백신 격차의 원인과 현황, 그리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와 과제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2. 의약품 접근성이란 무엇인가?
의약품 접근성(access to medicines)이란 단순히 물리적으로 의약품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적절한 시기에, 합리적인 비용으로, 효과적이고 안전한 의약품을 이용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보편적 건강보장(Universal Health Coverage, UHC)’의 핵심 요소 중 하나입니다.
의약품 접근성의 구성 요소:
가용성(Availability) | 필요한 약물이 실제로 존재하고 공급 가능한가? |
접근성(Accessibility) | 지리적·물리적으로 환자가 약에 접근할 수 있는가? |
합리적 가격(Affordability) | 경제적으로 감당 가능한 수준의 비용인가? |
품질(Quality) | 안전하고 효과적인 약품인가? |
지속성(Sustainability) | 장기적으로 안정적 공급이 가능한가? |
이 다섯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약이 ‘있다’고 해도 실질적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팬데믹 이후 부각된 글로벌 백신 격차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백신 개발과 보급이 국가 생존의 핵심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mRNA 백신의 신속한 개발과 승인은 과학적 성과였지만, 백신의 국가 간·계층 간 배분의 불균형은 국제사회의 큰 논란을 불러왔습니다.
현실로 드러난 격차:
- 2021년 중반 기준, 고소득 국가에서는 인구의 60~70% 이상이 접종을 완료한 반면, 저소득 국가에서는 10% 미만이 첫 접종조차 받지 못함.
- 화이자,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 등 주요 백신 제조사는 초기 생산물량의 대부분을 선진국에 사전 계약(Advance Purchase Agreement) 방식으로 공급.
- 아프리카, 중남미, 동남아시아 등 저소득·중소득 국가들은 백신 확보 자체가 늦어졌고, 보관·운송 인프라 부족으로 실질적인 접종률도 낮았음.
세계 백신 격차를 상징하는 데이터 (2022년 기준):
북미/유럽 | 70~85% | 도입 완료 | 없음 |
아시아 | 50~75% | 일부 지역 도입 | 물류, 계약 지연 |
아프리카 | 10~20% | 거의 없음 | 생산·운송·비용 |
4. 글로벌 의약품 불균형의 구조적 원인
의약품 접근성의 격차는 단순한 가격 문제를 넘어, 더 복잡한 구조적 원인들을 포함합니다.
1. 지적재산권과 특허 보호
- 선진국 제약사는 신약 개발에 투자한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엄격한 특허 보호 정책을 채택.
- 이는 저소득국에서 복제약 생산을 어렵게 하며, ‘의약품은 공공재’라는 개념과 충돌을 일으킴.
- 코로나19 백신 특허를 둘러싼 ‘TRIPS 유예’ 논쟁은 그 대표 사례.
2. 백신 제조 및 유통 인프라 부족
- 백신은 단순히 제조만으로 끝나지 않고, 콜드체인, 물류, 접종 인력 등 복잡한 시스템이 요구됨.
- 특히 mRNA 백신은 -70℃의 초저온 유통이 필요하여, 많은 국가에서는 실제 사용이 어려움.
3. 다국적 제약사의 이윤 중심 구조
- 글로벌 제약사는 시장성과 수익성을 중시하여, 인구 규모가 작거나 수익이 낮은 지역에는 우선 공급하지 않음.
- 긴급 상황에서도 생산량 증대를 선뜻 하지 않거나, 기술 이전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기도 함.
4. 국가 간 협상력 차이
- 고소득 국가는 막대한 예산과 협상력을 바탕으로 백신을 ‘선점’하는 반면,
- 저소득 국가는 가격 협상도 어렵고, 공공 조달 시스템도 미비해 의약품 확보의 우선순위에서 밀림.
5. 의약품 접근성 개선을 위한 글로벌 노력
팬데믹 이후 국제사회는 의약품 접근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진행 중입니다.
✅ COVAX 이니셔티브
- WHO, GAVI, CEPI가 공동 운영하는 백신 공동 구매 및 분배 플랫폼.
- 저소득국에도 백신을 평등하게 공급하기 위한 취지로 출범.
- 일부 성과를 거두었지만, 생산량 부족 및 선진국 중심 계약으로 공급 지연이 심각한 문제로 지적됨.
✅ TRIPS(무역관련 지식재산권) 면제 논의
- WTO는 코로나19 백신 및 치료제의 특허를 일시적으로 면제하는 안건 논의.
- 인도, 남아공 등의 주도로 추진되었지만, 미국·EU·스위스 등은 기업의 지식재산 보호를 이유로 난색.
- 일부 백신에 한해 부분 면제는 합의됐으나, 기술 이전은 제한적.
✅ 지역 생산 인프라 확대
- WHO는 아프리카와 중남미, 동남아 지역에 mRNA 백신 생산 허브 설립 계획을 발표.
- 파트너십을 통해 현지 기업에게 제조 기술을 이전하고, 백신 자립도를 높이는 전략 진행 중.
- 한국, 인도, 브라질은 백신 CMO/CDMO(위탁생산) 허브로 부상 중.
6. 한국의 접근성 관련 역할과 사례
대한민국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글로벌 보건 파트너로서의 위상을 강화해왔습니다.
- 백신 개발: SK바이오사이언스의 GBP510 백신이 WHO의 지원을 받아 COVAX 공급 대상으로 선정됨.
- 기술 이전: 한미약품, 삼성바이오로직스 등은 다국적 기업과 협력하여 백신 CMO 생산 기반 구축.
- ODA 및 공여: 국내 정부는 아시아·아프리카 개발도상국에 백신·진단키트·의료기기 등을 무상 공여하며 보건외교 확대 중.
7. 결론: 접근성 문제는 인류의 공동 과제
의약품 접근성은 단순한 보건의 문제가 아닌, 인류의 존엄과 연대, 공공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슈입니다. 기술은 진보하고 있지만, 그 혜택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상태입니다.
글로벌 백신 격차는 팬데믹 이후 그 민낯이 드러났지만, 이 문제는 코로나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항암제, 희귀질환 치료제, 유전자 치료제 등 고가 혁신 치료제 분야에서의 접근성 문제는 앞으로 더 심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입니다.
따라서, 국제사회는 단순한 백신 공여를 넘어, 지속 가능한 생산 인프라 구축, 기술 공유, 공공-민간 협력을 통한 의약품 접근성 확대 방안을 고민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어디에 살든지, 소득 수준과 관계없이 치료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전 세계가 지향해야 할 공중보건의 미래입니다.
'제약산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약사의 인플레이션 대응 전략: 원가 상승과 가격 통제 (0) | 2025.05.06 |
---|---|
인프라 구축, 기술 이전, 백신 주권 확보 전략 (0) | 2025.05.05 |
팬데믹 이후 전 세계 백신 제조 체계의 재편 (0) | 2025.05.04 |
저소득 국가에서의 백신 불평등과 제약사의 사회적 책임 (0) | 2025.05.03 |
패치 형태 백신 등, 비침습적 기술의 임상 적용 (0) | 2025.05.01 |
마이크로니들 기반 약물 투여 기술의 진화 (0) | 2025.04.30 |
나노기술을 활용한 난용성 약물의 전달 기술 (0) | 2025.04.29 |
경구 생체이용률 향상을 위한 나노 약물 전달 시스템 (0) | 2025.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