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코로나19가 바꿔놓은 백신 제조의 판도
코로나19 팬데믹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의 백신 개발과 생산을 견인한 사건이었다.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아 화이자-바이오엔텍,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 등 다양한 백신이 승인되었고, 수십억 도스가 전 세계에 배포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은 또한 지리적·경제적 불균형과 백신 민족주의(vaccine nationalism)라는 이름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팬데믹이 끝나가면서 세계는 지금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다음 위기를 대비하기 위해, 우리의 백신 제조 체계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으로 지금 전 세계에서는 ‘백신 제조 체계의 재편’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글에서는 팬데믹 이전과 이후의 백신 생산 체계 변화, 각국의 대응 전략, 그리고 향후 지속가능한 글로벌 보건 인프라를 위한 방향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2. 팬데믹 이전의 백신 제조 구조: 소수 기업의 집중 생산
코로나19 이전 백신 시장은 매우 집중화되어 있었다. 세계 백신 생산의 약 80% 이상은 다음의 4대 글로벌 기업이 차지하고 있었다.
화이자(Pfizer) | 폐렴, B형간염, COVID-19 등 | 미국, 벨기에 등 |
GSK | 인플루엔자, HPV, 말라리아 후보 백신 등 | 영국 |
사노피(Sanofi) | 광견병, 황열, 디프테리아 등 | 프랑스 |
머크(MSD) | HPV, 수두, 홍역 등 | 미국 |
이들은 대부분 선진국에 본사를 두고, 백신 제조 기술을 독점적으로 보유하고 있었으며, 개발도상국에는 제조 인프라보다는 백신 공급 형태로 참여했다. 즉, ‘제조의 권한’은 선진국 기업에 집중되고, 개발도상국은 소비자 역할에 머무는 구조였다.
3. 팬데믹 당시의 교훈: 공급 불균형과 글로벌 대응 실패
팬데믹 기간 동안 세계는 백신의 “속도는 빠르되, 분배는 불평등”한 현실을 마주했다. 고소득 국가들은 수십억 도스를 선구매하면서 자국민 접종을 우선했지만, 저소득 국가는 제때 백신을 확보하지 못해 수많은 인명 피해를 겪었다.
주요 문제점:
- 선진국 위주의 선구매 계약 (Advance Purchase Agreements, APA)
- mRNA 백신의 기술 독점과 기술 이전 거부
- COVAX의 공급 지연 및 물류 한계
- 냉장·저온 보관 체계 부족으로 인한 낭비
이러한 경험은 전 세계 보건 당국에 분명한 교훈을 남겼다. "전 세계 모든 대륙에 백신 생산 허브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4. 팬데믹 이후의 변화: 백신 제조 체계의 지역 분산
(1) WHO 주도 백신 제조 허브 설립
세계보건기구(WHO)는 팬데믹 이후, 백신 기술을 지역별로 이전하고 생산을 분산화하기 위해 ‘기술 이전 허브’를 지정했다. 대표적인 예시는 다음과 같다.
남아공 | mRNA 백신 기술 이전 허브 | Afrigen Biologics, WHO |
브라질 | 백신 및 바이오시밀러 생산 확대 | Fiocruz |
대한민국 | mRNA 백신 글로벌 교육 허브 | SK바이오사이언스, WHO 협력 |
특히 한국은 아시아 내에서 유일한 WHO 글로벌 백신 허브 국가로 지정되어, 백신 제조 인력 교육과 인프라 구축을 선도하고 있다.
(2) 지역 내 자립형 생산 기반 확대
다수 국가들이 자체 백신 제조 체계를 갖추기 위한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 인도: 세럼 인스티튜트(Serum Institute of India)를 통해 전 세계 백신의 60%를 생산하며 글로벌 생산기지로 부상
- 인도네시아, 태국: 자국 보건부 산하 생산시설 및 민간기업 통해 코로나 백신 자급화 시도
- 아프리카: 파나프리칸 백신 제조 연합 설립, 2040년까지 백신 자급률 60% 목표
5. 주요 제약사의 전략 변화
팬데믹 이전과 이후, 다국적 제약사들도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 기술 이전과 라이선싱의 확대
- 모더나는 mRNA 백신 생산 기술을 남아공, 케냐 등에 공유
- 화이자는 남아공의 Biovac과 mRNA 백신 병입·포장 계약 체결
- 존슨앤드존슨(J&J)는 인도의 Biological E와 기술 이전 협력
▶ 현지 생산 기지 다변화
- 사노피(Sanofi): 동남아 및 아프리카에 백신 생산 시설 신설 추진
- GSK: 인도, 나이지리아 등에 원료 제공 및 현지 생산 강화
- SK바이오사이언스: CEPI와 협력하여 차세대 백신 플랫폼 생산 확대
6. 글로벌 공조체계의 강화
백신 생산의 지역 다변화와 함께, 백신 생산 및 유통을 위한 국제 공조체계도 보다 정교해지고 있다.
◼ GAVI(세계백신연합)
팬데믹 이후 백신 개발 및 분배에 있어서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분배 기준 마련에 중점을 두고 있음. 고소득국·저소득국 간 가격 차등 적용 및 보조금 강화 추진.
◼ CEPI(전염병 대비 혁신연합)
‘100일 미션’ 전략 수립: 새로운 감염병이 등장하면 100일 이내에 백신 후보물질을 확보하고 생산 체계를 가동하는 구조를 목표로 함.
◼ COVAX의 구조적 개편
팬데믹 기간 동안 공급 지연과 불균형 분배로 비판받은 COVAX는 지역 거점 생산과 사전 계약 메커니즘 개선을 중심으로 개편 중이다.
7. 한국의 역할과 기회
한국은 mRNA 백신 위탁생산(CMO)뿐만 아니라, 자체 백신 개발과 글로벌 교육 허브 역할을 병행하며 아시아 중심 백신 생산국으로 입지를 넓히고 있다.
- SK바이오사이언스: 코로나 백신 ‘스카이코비원’ 개발, 국제 인증 획득
- GC녹십자: 백신 완제 생산 및 글로벌 조달 계약 체결
- 한미약품: mRNA 플랫폼 기반 백신 개발 프로젝트 추진
- 국가 차원: 백신 글로벌 허브 지원센터 및 국제협력 플랫폼 구축
8. 향후 과제: 재편된 구조의 지속 가능성
✅ 기술의 공개와 표준화
백신 제조 기술이 특정 기업에 독점되지 않고, 글로벌 표준 기술로 공유되어야 지역 생산 체계도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 냉장 인프라와 물류 개선
백신을 생산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저온 유통 인프라와 접종 시스템이다. 이를 위해선 각국의 보건 예산 증대와 ODA 확대가 병행되어야 한다.
✅ 팬데믹 이후 수요 감소에 따른 상업적 지속성
감염병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며, 백신 수요는 급감할 가능성이 있다. 과잉투자된 인프라의 유지 비용을 감당하려면, 백신 허브가 감염병 외에도 계절성 질환·신흥 감염병 백신을 지속 생산할 수 있도록 다변화가 필요하다.
9. 결론: 다음 팬데믹을 대비하는, 공평한 구조 만들기
팬데믹은 우리가 과학적으로 얼마나 빠르게 백신을 개발할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그러나 그 과학이 ‘누구에게도 도달할 수 없을 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제는 ‘개발’뿐 아니라 ‘공평한 접근’을 위한 제조 구조가 필수다. 그리고 그 구조는 특정 국가와 기업의 전유물이 아닌, 전 인류가 함께 구축하고 유지해야 할 공공 인프라여야 한다.
팬데믹 이후의 백신 제조 체계는 단순한 생산 시설 확장이 아니라, 책임 있는 기술 공유, 국제 협력, 그리고 윤리적 리더십에 기반한 변화여야 한다. 이는 단지 보건 위기 대응을 위한 수단을 넘어서, 전 세계 생명권의 평등이라는 더 큰 가치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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