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팬데믹이 드러낸 의약품 생산의 취약성
2020년, 전 세계는 코로나19라는 전례 없는 감염병 대유행을 경험하면서 ‘공공보건의 안보화’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마주했다. 그 중심에는 백신이 있었다. 각국은 백신을 확보하기 위해 사활을 걸었고, 이 과정에서 ‘백신 주권’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백신을 자체적으로 개발·생산하지 못하는 국가는 고스란히 글로벌 공급망 문제와 접종 지연의 피해를 입었다.
팬데믹이 끝난 지금, 세계는 자국민의 생명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백신 역량 확보를 국가 전략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세 가지에 있다. 첫째는 생산 인프라 구축, 둘째는 첨단 기술의 이전, 셋째는 제약 주권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다. 이 글에서는 이 세 축을 중심으로 백신 및 바이오의약품 분야에서의 국가 전략과 글로벌 동향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2. 백신 인프라 구축: 단순 공장이 아닌 ‘공공 안전망’
▍의미와 범위: 생산시설에서 품질관리까지
‘인프라 구축’이라 하면 흔히 백신을 만드는 공장만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 백신 인프라는 세포주 확보 → 원액 생산 → 병입 및 충전 → 품질 관리 → 유통 및 콜드체인 → 접종 인프라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포함하는 복합 시스템이다.
이는 곧 인프라 구축이 단순히 제조 설비에 그치지 않고, 전주기적 대응 능력 확보를 의미함을 보여준다.
▍팬데믹 이후 인프라 구축의 글로벌 동향
- 미국: Operation Warp Speed를 통해 제조 공장 신·증설에 대규모 투자
- EU: HERA(Health Emergency Response Authority) 설립, 백신 생산 전용 플랫폼 확충
- 아프리카: 아프리카 질병통제센터(CDC)를 중심으로 지역 생산 허브 구축 시도
- 한국: 백신 글로벌 허브 전략을 추진하며 오송·안동 등을 거점화
▍국내 사례: SK바이오사이언스, 녹십자, 한미약품
- SK바이오사이언스는 세계 최초 코로나 백신 위탁생산(CMO) 기업으로 주목받았으며, 현재는 CEPI와 함께 차세대 백신 제조 플랫폼 개발에 착수.
- 녹십자는 독감·B형간염 등 기존 백신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병입·포장 인프라 보유.
- 한미약품은 자체 mRNA 원료 생산 기술을 기반으로 백신 개발에 착수 중.
3. 기술 이전: 단순 라이선스가 아닌 ‘전이 가능한 기술 자립’
▍기술 이전이란 무엇인가?
백신이나 바이오의약품의 기술은 단순한 레시피가 아니다. 수십 년간 축적된 세포주 최적화, 발현 시스템, 정제 공정, 분석 기술 등은 ‘암묵지(tacit knowledge)’로 불리며 문서화가 어려운 노하우가 다수다. 따라서 기술 이전은 단순한 매뉴얼 전달이 아니라, 사람의 손에 의한 학습과 전이를 의미한다.
▍WHO의 mRNA 기술 허브
코로나 이후 WHO는 남아공을 mRNA 기술 허브로 지정하고, 모더나와 협력해 기술을 이전하려 했으나 기업의 비협조로 제한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남아공의 Afrigen Biologics는 자체적으로 mRNA 백신 복제에 성공해 지역 자립 가능성을 증명했다.
▍기술 이전이 활발한 사례
남아공 | Afrigen Biologics | mRNA 백신 핵심 공정 복제 성공 |
브라질 | Fiocruz |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기술 완전 이전 |
인도 | Serum Institute | 노바백스 백신 생산, 자립형 생산 거점화 |
한국 | SK, 한미 등 | mRNA 생산·충전·완제품 패키지 역량 확대 |
▍한국의 전략: “기술 수용국에서 기술 제공국으로”
한국은 mRNA 백신의 글로벌 교육 허브로 선정된 이후, 단순 수혜자가 아닌 ‘기술 제공국’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국가 차원의 기술 표준화, GMP 인증체계 강화, 그리고 생명공학 R&D의 체계화가 진행되고 있다.
4. 백신 주권 확보: 공급망에서 규제까지의 전방위 전략
▍백신 주권이란?
‘백신 주권’이란 백신 개발, 생산, 조달, 보급에 있어 외부 국가나 기업에 의존하지 않고 자국민의 생명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역량을 의미한다. 백신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수출까지 가능하다면 이는 경제적 주권을 넘어 외교적 레버리지로도 작용한다.
▍백신 주권을 위한 4대 전략 축
- 자체 R&D 투자 확대
- 기초 과학부터 임상, 허가까지 일관된 연구 생태계 조성
- 예: 국가 백신 연구개발 전략체계(한국), BARDA 지원(미국)
- 백신 국가비축제도 및 조달망 확대
- 국내 자급률 제고, 비상시 조달 시스템 구축
- 예: 국가필수의약품센터, 공공조달플랫폼 운영
- 규제기관 역량 강화
- 국제 공인된 허가 및 평가 역량 확보
- 예: 한국 식약처의 WHO PQ 인증 확대
- 해외 수출 및 글로벌 협력 전략 강화
- 중저소득국 대상 기술협력 및 공급 협약
- 예: COVAX 기여, 아세안 국가와의 백신 협력 MOU 체결
5. 제도와 정책의 정비: ‘포스트 코로나’를 넘는 시스템 구축
▍법제도 기반 마련
한국은 「감염병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비롯해 백신 개발과 생산에 필요한 법제도를 다듬어왔다. 최근에는 감염병 위기대응을 위한 백신·치료제 긴급허가 제도가 강화되고, 공공 백신 생산시설의 예산 지원이 확대되고 있다.
▍공공-민간 협력 모델 강화
팬데믹 시기 급조된 민간 위탁 구조에서 벗어나, 국가가 중심이 되는 공공 거버넌스를 강화하는 추세다. 예를 들어, 정부가 R&D 자금을 투입하고 민간이 생산과 상용화를 담당하는 PPP(Public-Private Partnership) 모델이 확대되고 있다.
6. 한국의 글로벌 리더십 기회
▍‘글로벌 백신 허브’로서의 역할
한국은 WHO가 지정한 글로벌 mRNA 백신 교육 허브를 바탕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생산 및 기술 훈련 거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향후에는 원천기술 개발과 플랫폼 백신 제조 역량을 통해 제약 바이오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다.
▍국제 협력의 중심축
- 아프리카 CDC, CEPI 등과의 협업
- ODA를 통한 중저소득국 기술 지원
- K-백신 브랜드화를 통한 수출 확대
7. 결론: ‘다음 팬데믹’을 준비하는 국가 전략의 3대 축
코로나19 팬데믹은 단순한 보건 위기를 넘어 국가 전략과 글로벌 경제 구조의 재편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이제 백신은 단순한 의약품이 아닌, 국가 안보·경제 자립·외교 전략의 핵심 자산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산 인프라의 내재화, 핵심 기술의 자국화, 백신 주권의 제도화는 미래 감염병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자, 동시에 우리나라가 글로벌 보건안보 리더로 도약할 수 있는 전략적 기반이다.
팬데믹 이후의 세상은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고 선제적으로 준비하는 능력이 경쟁력이 된다. 지금의 백신 전략은 그 미래를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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