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인플레이션이 제약 산업에 미치는 충격
세계 경제는 코로나19 팬데믹, 글로벌 공급망 붕괴, 에너지 가격 급등 등을 겪으며 장기적 인플레이션 국면에 접어들었다. 인플레이션은 단순히 생활물가만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제조업, 특히 복잡한 생산 공정과 긴 제품 개발 주기를 가진 제약 산업에도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원재료비, 인건비, 에너지 비용, 물류비 상승이 제약사의 원가구조를 압박하는 한편, 각국 정부는 공공의료비 지출을 통제하기 위해 약가 규제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즉, 제약사는 원가는 급등하는데 가격 인상은 쉽지 않은 이중 압박에 직면해 있는 셈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글로벌 제약사들은 어떤 전략으로 대응하고 있을까? 이 글에서는 제약사들의 인플레이션 대응 전략을 원가 절감, 가격 정책, 공급망 재편, 그리고 R&D 혁신이라는 네 가지 축을 중심으로 심층 분석해본다.
2. 원가 절감 전략: 내부 효율성 극대화
▍제조 공정 최적화
제약사는 전통적으로 제조 공정 최적화를 통해 원가를 절감해 왔다. 특히 고가의 활성약물성분(API) 제조에서 공정 단순화, 생산 수율 향상, 에너지 사용 최적화 등이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 화이자(Pfizer)는 주요 백신 생산 라인에 자동화 설비를 도입해 생산성을 20% 향상시키고 에너지 사용량을 15% 절감하는 데 성공했다.
- 노바티스(Novartis)는 Lean Manufacturing 시스템을 제약 생산 라인에 적용해 제조 리드타임을 대폭 단축했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생산 설비의 스마트화, 공정 모니터링 자동화, 공급망 예측 시스템 구축 등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 인플레이션 대응에 핵심 수단으로 부상하고 있다.
- 로슈(Roche)는 AI 기반 생산 계획 시스템을 도입해 재고 비용을 10% 절감했다.
- 머크(Merck)는 IoT 센서를 통한 실시간 공정 모니터링으로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했다.
3. 가격 정책: 제한된 가격 인상과 약가 포트폴리오 전략
▍약가 인상: 제한적이지만 불가피한 조정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일부 제약사는 약가를 인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규제 당국과 환자단체의 강력한 반발을 고려해 연간 인상폭은 평균 5% 이내로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
- 미국에서는 화이자, 존슨앤드존슨, 애브비 등이 2024년 초 평균 4.5% 내외로 약가를 인상했다.
- 유럽연합은 공공 건강보험 체계의 부담을 이유로 가격 인상에 매우 신중하며, 별도의 협상을 통해 제한적으로만 인상 허용.
▍포트폴리오 재구성 전략
가격 인상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제약사들은 고가 생물학적 제제, 희귀질환 치료제, 혁신신약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조정하고 있다. 이들 제품은 가격 탄력성이 높아 인플레이션 상황에서도 비교적 높은 수익성을 유지할 수 있다.
- 사노피(Sanofi)는 희귀질환 치료제(젠자임 부문) 매출 비중을 대폭 확대했다.
- 릴리(Eli Lilly)는 고가 GLP-1 비만 치료제(제플로시티) 중심으로 수익구조를 전환하고 있다.
4. 공급망 재편: 글로벌 리스크 대응과 비용 안정화
▍현지화(Localization) 전략 강화
글로벌 공급망 불안정은 인플레이션과 맞물려 제약사들로 하여금 현지 생산·조달 전략을 강화하게 만들었다.
- 화이자는 벨기에, 아일랜드 등 유럽 지역에 추가 생산 설비를 신설했다.
- 아스트라제네카는 인도, 브라질에 현지 생산 허브를 구축해 원가 안정화를 추진 중이다.
▍복수 공급처 확보
원료의약품(API)과 핵심 부자재의 공급처를 다변화해 가격 급등 리스크를 분산하는 것도 주요 대응 전략이다.
- GSK는 주요 백신 원료에 대해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최소 3개 공급처를 확보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 존슨앤드존슨은 핵심 공급망에 대해 재고일수 확대 정책을 실시해 공급 불확실성에 대비하고 있다.
5. R&D 혁신: 비용-효율성의 최적 균형 추구
▍임상시험의 스마트화
R&D 비용은 제약사 전체 비용구조의 30~40%를 차지할 만큼 크다. 이에 따라 제약사들은 디지털 임상시험(Decentralized Clinical Trials, DCT), AI 기반 후보물질 발굴 등 비용절감형 혁신 방법을 적극 도입하고 있다.
- 노바티스는 AI 기반 신약 후보물질 도출 프로젝트를 통해 초기 개발 기간을 30% 단축했다.
- 암젠(Amgen)은 분산형 임상시험 도입으로 환자 모집 비용을 20% 이상 절감했다.
▍'Fast-to-Market' 전략
빠른 제품 출시를 통한 조기 수익화도 중요하다. 일부 제약사는 희귀질환 치료제, 항암제 등 분야에서 가속승인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해 제품을 조기 시장에 출시하고 있다.
- 릴리는 알츠하이머 치료제 돈네마브(Donanemab)에 대해 FDA 가속 승인을 신청해 시장 출시를 앞당겼다.
6. 결론: 복합적 대응으로 인플레이션 파고를 넘다
제약 산업은 본질적으로 고정비 비중이 높은 산업이다. 원가 상승이 발생하면 곧바로 수익성에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나 글로벌 제약사들은 단순 가격 인상이라는 단기적 대응에만 의존하지 않고, 제조 혁신, 디지털 전환, 포트폴리오 최적화, 공급망 재구축, R&D 혁신 등 다각도의 전략을 통해 인플레이션 환경을 돌파하고 있다.
특히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제약사는 이러한 변화를 '위기'가 아닌 '혁신의 기회'로 삼으려는 적극적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인플레이션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이 변화를 계기로 더 유연하고 지속가능한 산업 구조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인지가 향후 10년 제약 산업의 성패를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7. 글로벌 지역별 인플레이션 대응 차별화 전략
인플레이션은 지역별로 양상이 다르기 때문에, 글로벌 제약사들은 각 시장에 맞는 맞춤형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미국: 제한적 약가 인상과 보험사 협상 강화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제약 시장이지만, 최근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 IRA) 시행으로 인해 고가약에 대한 정부 직접 가격 협상이 확대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제약사들은 약가 인상 폭을 자제하면서, 보험사(PBM)와의 협상을 강화해 리베이트(환급금) 구조를 최적화하고 있다.
- 애브비(AbbVie)는 험이라(Humira)의 제네릭 진입에 대비해 스카이리치(Skyrizi)와 린보크(Rinvoq) 같은 신약으로 보험 포뮬러리(list)에 우선 진입하는 전략을 펼쳤다.
▍유럽: 약가 동결 압박과 비용 최적화
유럽은 대부분 국가가 단일 지불자 체계를 가지고 있어 정부 주도로 약가가 통제된다. 인플레이션 상황에서도 약가 인상 허용이 매우 제한적이다. 이로 인해 제약사들은 고정비 절감, 조세 최적화, 지역별 제조설비 통합 등 내부 효율화 전략에 더 집중하고 있다.
- 사노피(Sanofi)는 유럽 내 소규모 생산시설을 통합하고, 일부 제네릭 사업 부문을 분사하여 비용 구조를 슬림화했다.
▍중국 및 신흥 시장: 가격 인하 수용과 볼륨 확장 전략
중국은 정부가 주도하는 대규모 약가 인하(집중구매, Volume-based Procurement)를 통해 약품 단가를 크게 낮추고 있다. 이에 대응해 글로벌 제약사들은 일부 제품의 가격 인하를 수용하는 대신, 판매 물량 확대(volume growth) 전략을 병행하고 있다.
- 노바티스는 중국 시장에서 약가 인하를 수용하는 대신, 대도시 외 중소도시 병원 진입을 확대해 물량을 늘리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8. 중장기적 대응: ESG와 지속가능성 경영 연계
인플레이션 대응 전략은 단기적인 비용 절감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많은 글로벌 제약사는 인플레이션 위기를 장기적 지속가능성 확보 기회로 삼아,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친환경 제조 공정 전환
에너지 비용이 급등한 상황에서도 화석연료 의존을 줄이고, 친환경 에너지원으로 전환하는 투자가 늘고 있다.
- 로슈(Roche)는 스위스 본사 생산시설에 태양광 및 풍력 에너지를 도입해 2030년까지 탄소중립을 목표로 설정했다.
- 존슨앤드존슨은 바이오의약품 생산 공정에 재생에너지 100%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공정하고 투명한 약가 정책
사회적 신뢰 확보 차원에서, 일부 제약사는 약가 인상 시 사전 공시를 하고 환자단체와 적극 소통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 길리어드(Gilead)는 약가 인상 시마다 주요 환자단체 및 언론에 그 배경을 설명하고, 연례 CSR 보고서에 관련 내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
9. 실제 사례 분석: 인플레이션 대응에 성공한 제약사
화이자(Pfizer)는 팬데믹 기간 동안 백신과 치료제를 통해 급격히 매출이 증가했지만, 인플레이션 압박도 동시에 겪었다. 이에 화이자는 다음과 같은 다각적 전략을 실행했다.
- 제조공정 디지털화로 생산원가를 절감했다.
- 유럽, 아시아에 추가 백신 생산시설을 구축해 지역별 공급망 리스크를 분산했다.
- 고수익 제품(코로나19 백신, 경구용 치료제) 중심으로 매출 포트폴리오를 조정했다.
- ESG 경영을 강화해 투자자 신뢰를 높이고 장기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이러한 종합적 대응 전략을 통해 화이자는 인플레이션 환경에서도 높은 수익성과 안정적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10. 향후 전망: 인플레이션 속 제약 산업의 패러다임 전환
인플레이션은 단순히 비용 상승 문제를 넘어, 제약 산업의 구조적 변화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 디지털화: 스마트 제조, AI 기반 임상, 디지털 치료제(DTx) 분야가 더욱 빠르게 확장될 것이다.
- 지역화(Localization): 글로벌 생산망을 넘어, 지역 내 자급자족형 생산 거점이 중요해질 것이다.
- 사회적 책임 경영(ESG): 가격 통제, 접근성 강화, 친환경 생산이 기업 생존전략의 핵심이 될 것이다.
향후 제약 산업은 '혁신'과 '책임'을 동시에 요구받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기업들은 단순히 제품을 개발하는 것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고, 지속 가능한 가치 창출과 사회적 신뢰 확보라는 이중 과제를 해결해야만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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