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분석, 그 중심에는 '신뢰성'이 있다
신약 개발 과정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자원이 투입되는 단계 중 하나는 바로 "바이오분석(Bioanalytical Method)"입니다. 특히 혈장(plasma), 혈청(serum), 소변(urine), 조직 등 다양한 생체 시료 내의 약물 및 대사체의 농도를 정확하게 정량화하는 것은 임상시험의 기초가 되는 데이터의 품질을 결정짓는 핵심 과정입니다. 이러한 분석법이 얼마나 일관되며 신뢰할 수 있느냐는, 결국 해당 신약의 허가 여부와 직결되는 사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동안 바이오분석법의 밸리데이션(검증)에 대한 국제적인 기준은 지역별로 조금씩 달랐습니다. 미국 FDA, 유럽 EMA, 일본 PMDA 등이 각각의 가이던스를 제시하던 가운데, 이들 사이의 차이로 인해 다국적 임상시험의 분석 결과를 상호 인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국제의약품규제조화위원회(ICH)는 2022년 "M10: Bioanalytical Method Validation and Study Sample Analysis"라는 제목의 가이드라인을 최종 채택했습니다. 이 가이드라인은 글로벌 규제기관이 공통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분석법 검증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앞으로의 신약 개발과 분석 업무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렇다면, 실제 현장에서 이 ICH M10 가이드라인은 어떻게 적용되고 있을까요? 국내와 해외의 실무자들은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실질적인 차이를 느끼고 있을까요?
ICH M10 가이드라인의 핵심은 무엇인가?
M10 가이드라인은 기본적으로 바이오분석법의 "유효성(Validity)"과 "신뢰성(Reliability)"을 보장하기 위한 기준을 명확히 합니다. 기존의 개별 가이드라인들과 비교할 때 다음과 같은 주요 특징들이 있습니다.
1. 통합된 프레임워크 제공
M10은 기존에 존재하던 FDA의 2018년 가이던스, EMA의 2011년 가이던스, 그리고 일본 PMDA의 문서들을 통합한 형식입니다. 이로써 분석법 밸리데이션에서 요구되는 검증 항목들—정확도, 정밀도, 선택성, 감도, 회수율, 안정성 등—에 대해 전 세계가 공통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2. 분석 전 처리와 시료 안정성의 강조
특히 분석 전 처리(pre-analytical phase)에서의 실수나 불확실성이 결과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해, 시료의 채취, 보관, 운반 조건까지도 밸리데이션 프로토콜에 포함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무자 입장에서 실제 업무의 복잡도를 증가시키지만, 동시에 데이터의 신뢰도를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변화입니다.
3. Reanalysis 기준의 명확화
M10은 시료 재분석(reanalysis) 시 어떤 경우에 허용되는지, 어떤 기준으로 진행되어야 하는지 명확히 합니다. 이는 과거 임상시험에서 흔히 문제되던 "Outlier 재분석"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4. 'Incurred Sample Reanalysis' (ISR)의 의무화
ISR은 분석법의 재현성과 반복 가능성을 확인하는 과정으로, 분석된 실제 시료 중 일부를 다시 분석하여 처음 결과와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는 절차입니다. ICH M10은 이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임상시험 분석 과정에서 이를 필수적으로 시행할 것을 요구합니다.
실제 분석 사례: LC-MS/MS 기반 항암제 분석
한 국내 제약사에서 수행한 LC-MS/MS 기반 항암제 정량 분석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회사는 2023년 글로벌 3상을 준비하면서 M10 가이드라인에 따라 바이오분석법 밸리데이션을 처음으로 전면 적용하였습니다.
- 시료 종류: Human plasma
- 타깃 물질: 소분자 항암제 (CYP3A4 기질)
- 매트릭스 효과 평가: 6개 기증자 혈장으로 matrix factor 평가
- 정량범위: 1 ng/mL ~ 500 ng/mL
- 내부표준물질: 안정동위원소(Stable Isotope Labeled) 사용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이슈는 ISR과 LLOQ 근접값에서의 재현성이었습니다. 특히 LLOQ 근처에서 CV가 15%를 초과하는 경우가 있었고, 이는 처음부터 반복 실험 설계를 포함하도록 M10 프로토콜을 수정함으로써 해결하였습니다.
국내 vs. 해외의 실무 적용 차이
1. 기술 인프라와 장비 역량
국내 분석실에서는 LC-MS/MS 기기의 민감도 향상에 따라 과거보다 정량 범위가 대폭 넓어졌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의 일부 CRO들은 오히려 기기 민감도보다 데이터 관리 시스템(GxP 환경의 자동화)이 더 강화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 미국: Thermo, SCIEX 장비에 21 CFR Part 11 대응 LIMS 연동이 기본화
- 국내: 장비는 우수하지만 일부 중소 CRO는 GxP 시스템이 미흡한 경우 존재
2. 밸리데이션 문서화 관행
미국 FDA의 경우, 밸리데이션 리포트의 상세한 문서화가 강조됩니다. Audit trail, raw data backup, SOP 일치 여부까지 꼼꼼히 점검합니다. 반면 국내에서는 과거 일부 CRO에서 요약 보고서만 제출하는 경우가 있었고, 현재는 점차 글로벌 수준으로 보완되고 있습니다.
- EMA: "Validation summary + raw data analysis workbook 필수 제출"
- 한국: "Validation 보고서 중심 + raw data는 필요 시 제공"
3. 재현성 검증에 대한 문화적 차이
ISR의 경우, 유럽은 일정 비율을 넘어서는 outlier가 있을 때 재시험을 강력히 제한합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여전히 일부 사례에서 재분석을 통한 보정이 관행처럼 남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글로벌 임상시험에서는 이런 방식이 문제로 지적될 수 있습니다.
ICH M10 적용 후의 실질적 변화
✔ 데이터 품질 향상
기존보다 ISR 등 반복 검증이 강화되면서, 단순히 분석법 하나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분석 프로세스의 품질 관리"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 분석 비용 상승
문서화 요구사항과 SOP 프로세스가 강화됨에 따라 분석 인력의 교육, 장비 유지, 문서관리 비용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기적으로 비용 부담으로 작용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데이터 신뢰성과 글로벌 수용성을 보장하는 투자로 여겨져야 합니다.
✔ CRO와 제약사 간의 협업 확대
M10 이후 분석 CRO와 제약사 간의 "사전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해졌습니다. 밸리데이션 범위, ISR 계획, 시료 전처리 조건 등을 사전에 명확히 합의해야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결론: M10은 '불편한 진실'이 아니라 '필요한 진화'
처음 M10 가이드라인이 발표되었을 때, 많은 실무자들은 "과도한 규제"라고 느꼈습니다. 모든 데이터를 문서화하고, ISR을 반복하고, SOP를 일일이 재정비하는 과정이 분명 버겁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기준이 분석법의 신뢰성을 한층 끌어올리는 데 기여하고 있으며, 특히 다국적 임상시험에서 동일한 분석 기준을 가지고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장점입니다.
이제는 단순히 분석법 하나만 잘 만드는 시대가 아니라, "분석 데이터를 어떻게 관리하고, 이를 글로벌 규제기관에 신뢰감 있게 제시하느냐"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입니다. 분석팀 연구원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정량 값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숫자의 '신뢰성'을 증명하는 일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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