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제약산업

저소득 국가에서의 백신 불평등과 제약사의 사회적 책임

 

1. 서론: 왜 백신 불평등을 논해야 하는가

2020년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은 전 인류에게 동일한 바이러스 위협을 가했지만, 그 대응과 회복의 속도는 국가마다 극명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문제 중 하나는 바로 백신의 불평등한 분배와 접근성입니다. 고소득 국가는 빠르게 백신을 확보하고 집단면역을 향해 나아갔지만, 저소득 국가는 백신 확보조차 어려웠고, 여전히 낮은 접종률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물류 문제’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보건의료 접근성의 구조적 불평등, 글로벌 제약사와 국제사회가 안고 있는 윤리적 책임, 그리고 인류 공동체로서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문제입니다. 특히, 혁신적 의약품을 개발하고 공급하는 제약사들이 이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저소득 국가에서의 백신 불평등과 제약사의 사회적 책임
저소득 국가에서의 백신 불평등과 제약사의 사회적 책임

 


2. 백신 불평등: 숫자가 보여주는 현실

국제 백신공동구매 프로그램인 COVAX를 통해 저소득 국가에 백신을 보급하겠다는 국제사회의 공조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아래 표는 2022년 중반 기준 각 소득 그룹별 백신 1차 접종률을 보여줍니다.

소득 수준                     1차 접종률 (%) 주된 공급 백신                                           접종 지연 이유
고소득 국가 75~90 mRNA, 아스트라제네카 충분한 선구매와 콜드체인
중소득 국가 40~65 아스트라제네카, 시노팜 자금·물류 병목
저소득 국가 10~20 시노팜, J&J 일부 백신 접근 자체의 어려움

이처럼, 세계가 하나의 질병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료와 예방을 위한 백신이라는 도구가 평등하게 나눠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과학적 진보’와 ‘윤리적 책임’ 사이의 괴리를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백신 접근성을 가로막는 구조적 요인들

(1) 백신 생산의 독점 구조

팬데믹 당시 가장 먼저 백신을 생산한 기업들은 화이자(Pfizer), 모더나(Moderna), 아스트라제네카(AZ) 등 글로벌 빅파마(big pharma) 기업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백신 기술을 자체 보유한 상태에서 특허와 제조 권리를 보호하면서, 대규모 선구매 계약을 통해 백신을 고소득 국가에 집중 공급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소득 국가들은 백신을 ‘살 수 있는 시장’에조차 들어가지 못하는 현실을 맞닥뜨렸습니다.

(2) 지식재산권 보호와 기술 이전 거부

많은 저소득 국가는 자체적으로 백신을 제조할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선진국 제약사들이 백신 기술을 공유하거나 기술이전을 통해 생산을 도와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다수 제약사와 선진국 정부는 지식재산권(TRIPS 협정)에 기반하여 이를 거부하거나, 기술 이전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3) 물류 인프라 부족

일부 백신은 -70℃ 이하의 초저온 보관 및 운송이 필수인 제품(mRNA 백신)이기 때문에, 기술보다 더 큰 문제는 ‘보관하고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내륙 지역이나 분쟁 지역은 이러한 인프라가 전무하여, 설사 백신이 공급되더라도 실질적인 접종이 어려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4. 제약사의 사회적 책임: 무엇이, 어떻게 필요한가?

제약사는 비영리 조직이 아닙니다. 투자자들에게 수익을 제공하고, 신약 개발을 위한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구조상 상업적 동기 부여는 필수입니다. 그러나 팬데믹처럼 세계 전체가 위기 상황에 빠졌을 때, 제약사는 자신들이 가진 과학과 기술을 어느 범위까지 공공 이익에 활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1) 윤리적 의무로서의 기술 공유

기술과 생산 공정을 엄격히 통제하며 이익을 우선시하는 전략은 단기적 수익은 보장할 수 있지만, 장기적인 사회적 신뢰와 지속가능성에는 역행할 수 있습니다. 일부 기업은 WHO와 협력하여 기술을 공유하거나, 인도·남아공 등에 백신 생산 시설을 세우는 등 긍정적인 시도를 했지만, 이는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2) 선구매 대신 ‘공정 구매’ 모델 도입

다수의 백신이 고소득국에 먼저 돌아가게 된 배경은 Advance Purchase Agreement (선구매 계약) 때문입니다. 이 모델은 자금 여력이 없는 국가에겐 시장에 진입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폐쇄적 구조였습니다. 팬데믹 이후 제안되는 모델은 ‘공정 구매’ 또는 ‘동시 배분 모델’로, 백신을 일정 비율로 국가 간 동등하게 분배하거나, 우선 위험도가 높은 국가에 먼저 공급하는 방식입니다.

(3) 사회공헌을 넘는 ‘공공 이익 기업(PBC)’ 역할

일부 전문가들은 글로벌 제약사들이 스스로를 ‘공공 이익 기업(Public Benefit Corporation)’으로 전환하거나, 일정 비율의 수익을 공공보건 개선에 재투자하는 식의 지속가능한 CSR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유럽 일부 바이오 기업은 팬데믹 이후 이와 같은 방향으로 기업 정체성을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5. 국제사회와 제약사 협력의 미래 과제

✅ 기술 이전 및 백신 제조 허브의 다각화

WHO는 남아공, 브라질, 한국 등을 백신 제조 기술 이전 허브로 선정하고, 다국적 제약사와의 협력 모델을 구축 중입니다. 지역 기반 생산체계가 확립되면, 향후 또 다른 팬데믹에서도 글로벌 백신 불균형이 줄어들 것으로 기대됩니다.

✅ 특허의 공공적 활용

‘특허권이 공공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면, 한시적이라도 공유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는 커지고 있습니다. 특허권의 한시적 면제와 오픈 라이선싱,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국제 법적 장치 마련은 중장기적 과제입니다.

✅ 백신 분배의 국제 기준 정립

‘어떤 백신을, 누구에게, 얼마나 먼저 공급할 것인가’에 대한 글로벌 기준이 필요합니다. 감염병 위험도, 접종률, 의료 인프라 등을 고려한 과학적이고 윤리적인 배분 모델이 향후 표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6. 결론: 과학의 진보는 윤리와 함께 가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제약 산업의 기술력과 속도를 전 세계에 각인시켰지만, 동시에 그 과실이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윤리적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앞으로의 감염병 대응은 과학기술의 진보에만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의약품이 ‘누구에게나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제약사와 국제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궁극적으로 백신은 생명을 지키는 공공재여야 하며, 지리적, 경제적 한계에 상관없이 모두가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약사가 진정한 글로벌 리더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