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HTA가 왜 중요한가?
약가 결정은 단순한 가격 문제가 아니다. 공공재로서의 의약품은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며, 건강보험 재정과 의료 시스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혁신적인 고가 약물이나 희귀질환 치료제, 첨단 세포유전자치료제의 등장으로 인해 '가치 기반 약가 산정'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한 개념이 바로 HTA(Health Technology Assessment, 건강기술평가)이다.
HTA는 의약품, 의료기기, 진단기술 등 모든 건강 관련 기술의 임상적 효과, 비용 효과성, 사회적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제도로, 각국의 약가 및 급여 결정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번 글에서는 미국, 영국, 독일, 일본, 한국의 HTA 시스템을 비교 분석하며, 한국이 직면한 과제와 정책적 시사점을 함께 살펴본다.
1. 영국: NICE를 통한 '가치 기반' 약가 결정
1.1. 기관 개요
영국은 HTA 제도의 선도국가로 평가받으며, 그 중심에는 1999년 설립된 NICE(National Institute for Health and Care Excellence)가 있다. 이 기관은 독립적인 공공기구로서, 신약을 포함한 모든 건강기술에 대한 임상적, 경제적 평가를 실시한다.
1.2. 평가 기준
NICE는 약물의 비용 효과성(cost-effectiveness)을 평가할 때 일반적으로 QALY(질 보정 생존연수) 당 20,000~30,000 파운드를 기준으로 삼는다. 즉, 신약이 이 범위 내의 비용 효과성을 가진다면 NHS(National Health Service)에서 해당 약제를 환급 대상으로 인정할 가능성이 높다.
1.3. 특징
- 임상 가치 + 비용 효과성 동시 고려
- 제한적 재정 내 최선의 선택을 강조
- 환자 및 시민의 의견을 공식적으로 반영
- ‘Cancer Drugs Fund’ 같은 예외적 재정지원 모델 운영
2. 독일: AMNOG 제도를 통한 '추가 효과' 중심 평가
2.1. 기관과 절차
독일은 2011년부터 AMNOG(Arzneimittelmarkt-Neuordnungsgesetz) 제도를 시행하며, 신약이 시장에 출시된 후 G-BA(Federal Joint Committee)와 IQWiG(독립적 건강기술평가기관)가 추가 치료 혜택(additional benefit)을 평가한다.
2.2. 핵심 특징
- 제조사가 자유 가격으로 출시 후, 1년 내 협상을 통해 약가 결정
- IQWiG는 주로 임상 데이터 중심으로 신약이 기존 치료 대비 제공하는 혜택을 평가
- 추가 효과가 높을수록 약가 인상 허용, 효과가 없거나 유사할 경우 가격 인하
2.3. 장점
- 빠른 환자 접근성과 혁신 유인 유지
- 임상 근거에 기반한 실질적인 약가 조정
- 투명한 평가 체계
3. 미국: 다원화된 민간 중심의 HTA 시스템
3.1. 제도적 특성
미국은 연방 단위의 통일된 HTA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ICER(Institute for Clinical and Economic Review) 같은 비영리 독립 기관이 대표적 역할을 한다. 이 기관은 임상 가치, 비용 효과성, 환자 접근성 등을 종합 평가해 민간 보험자나 주정부가 의사결정 시 참고할 수 있도록 보고서를 제공한다.
3.2. 접근 방식
- QALY 기반의 가치 평가
- 도입 시 강제성은 없으나, 보험자와 정책 결정자에게 강한 영향력 행사
- 민간 보험자들이 ICER의 가이드라인을 활용해 급여 여부를 결정
3.3. 문제점
- 공공 보험(Medicare, Medicaid)은 HTA 기반 의사결정이 제한됨
- 약가 통제 미비 → 고가 약물 급증
- 환자 부담 증가, 접근성 격차 확대
4. 일본: 비용 효과성 평가 도입과 제한적 적용
4.1. 제도 개요
일본은 2019년부터 정식으로 비용 효과성 평가 제도를 도입하였다. 중앙사회보험의료협의회(Central Social Insurance Medical Council, Chuikyo)가 중심이 되어 신약 및 고가 의료기기의 약가 조정에 이를 활용한다.
4.2. 운영 방식
- 특정 고가 의약품 및 장비만을 대상으로 한정 적용
- HTA 결과에 따라 약가 조정률(예: 최대 15%)을 결정
- 기존 약가 제도의 틀 내에서 제한적으로 사용
4.3. 평가
- 공공의료 체계 안에서의 조심스러운 접근
- 제약사의 반발과 환자 접근성 우려로 전면 적용엔 신중
- 그러나 향후 확대 가능성 존재
5. 한국: 제한적 HTA와 지속적인 제도 개선 과제
5.1. 국내 제도 개요
한국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HIRA) 산하에 있는 건강기술평가본부에서 HTA를 운영하고 있으며, 신약의 급여 여부를 결정할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주요 기준은 임상적 유용성, 비용 효과성, 대체 치료재 존재 여부 등이다.
5.2. 현실적 과제
- 지나치게 보수적인 비용 효과성 기준 → 혁신 신약 진입 장벽
- 급여화에 장기간 소요 → 환자 접근성 저하
- 국제적 기준 대비 낮은 약가 수용 범위
- 기술·임상 불확실성이 큰 혁신치료제(예: 유전자치료제, 희귀질환 치료제)에 대한 유연한 대응 부족
5.3. 최근 개선 시도
- 위험분담제 확대(성공불확실성, 환급형 등 다양한 구조)
- 조건부 급여 제도(CED) 도입 논의
- K-HTA로 통합된 고도화된 평가시스템 추진
6. 글로벌 HTA 시스템 비교 표
평가 주체 | 공공기관 | 공공/독립기관 | 비영리 민간기관 | 정부기관 | 공공기관 |
강제성 | 있음 | 있음 | 없음 | 제한적 적용 | 있음 |
평가 방식 | 비용 효과성 + 임상 가치 | 추가 치료 혜택 중심 | QALY 기반 | 비용 효과성 일부 | 비용 효과성 + 대체재 |
환자 접근성 고려 | 중간 | 높음 | 낮음 | 중간 | 낮음 |
혁신 신약 진입 장벽 | 낮음 | 중간 | 낮음 | 높음 | 높음 |
환자 참여 | 제도화 | 제한적 | 있음 | 제한적 | 미흡 |
7. 결론: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
한국의 HTA 제도는 현재까지 약가 억제 중심의 프레임 안에서 운영되어 왔으며, 공공재정의 효율성을 확보하는 데에는 일정 부분 기여해왔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있다. 환자 맞춤형 치료, 첨단 바이오의약품, 희귀·난치성 질환 치료제 등 고비용·고위험 의약품이 급증하는 지금, 보수적인 HTA만으로는 국민의 건강권을 충분히 보장하기 어렵다.
한국도 이제는 ‘혁신을 수용하는 HTA’, ‘환자 중심의 평가체계’, '데이터 기반 실증 분석(RWE)의 적극 활용’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특히 리얼월드데이터(RWD), 디지털 헬스케어 기반 데이터 등을 활용한 신약 평가 고도화, 위험분담형 모델 확대, 환자와 시민사회의 의견 반영 등은 필수적이다.
또한 해외 주요국처럼 신속심사·조건부 급여 등의 예외적 경로를 체계화하고, 혁신성과 사회적 가치까지 반영하는 다층적 HTA가 필요하다. 이는 제약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와도 직결된다.
마무리하며
HTA는 단지 약값을 결정하는 기술적 절차가 아니라, 의약품이라는 공공재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 과정이다. 이제 한국도 건강기술평가의 기준을 ‘비용 절감’에서 ‘가치 기반 보건의료 시스템’으로 확장해나가야 할 시점이다. 글로벌 동향을 반영한 제도적 진화를 통해 국민의 건강권과 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HTA의 목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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